김성근 어록
1. 외국인 용병관련 논란
"여긴 너희가 전에 뛰던 팀과 다르다. 감독이 김성근이다. 무슨의미인지 잘 생각해보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2/02/0200000000AKR20150202035900007.HTML
2. 권혁의 혹사에 대해
- 선수를 혹사시킨다는 비판을 또 받고 있는데.
“권혁은 직구의 힘이 떨어지면 얻어맞는 투수지. 힘을 빼서 커브를 섞어 던지면 타자들이 못 쳐. 그런데 힘으로만 덤비면 직구가 가운데로 몰리면서 얻어맞아.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혹사가 아니야. 권혁이 성장하는 과정이지.”
3. 박정진 연투관련
- 베테랑 박정진도 데뷔 후 가장 많은 경기에 등판했다.
“정신 자세가 달라졌어. 원래 박정진은 연투(連投)가 안 되는 투수였다고. 시즌 초 어느 날 코치한테 ‘연투가 어렵다’고 했다는 거야. ‘너, 몇 살이야?’라고 물었더니 마흔이래. 그래서 ‘그렇게 할 거면 야구 그만둬’라고 했지. 20년 가까이 한계를 못 넘은 거잖아. 이후로 싹 달라졌어. 선배로서 책임감을 갖게 됐지.”
4. 선수들 부상관리
“보이진 않지만 우리 선수들 꽤 강해졌어. 주축 타자 김태균·정근우가 부상을 참고 뛰잖아. 예전 같았으면 몇 경기 빠지고 쉬었겠지. 그런데 부상을 이겨내면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있어. 투구에 종아리를 맞고 한 달을 쉬어야 한다던 이용규도 20일 만에 돌아왔잖아.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손아귀에 없던 힘도 생기는 거야.”
5. 최진행 약물관련 옹호
김성근 감독은 "고의적으로 먹었으면 몰라도 실수다. 우리도 소화제를 먹을 때 그냥 먹지 무슨 성분인지는 따지지 않지 않나. 최진행도 미국에서 온 약을 아는 사람한테 받았다는데 확인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일이 일어난 자체는 최진행 실수이고,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최진행이 미안하다고 전화가 왔더라. 이미 일어난 일이고, 다신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했다. 집에서 자숙하고 있으라 했다"며 "알고 한 것이 아니라 몰랐다는 것 자체가 죄다. 내가 6~7개월간 봐온 최진행은 일부러 할 아이가 아니다. 몸 만들 필요도 없이 힘이 넘치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6. 김민우 불펜등판후 바로 선발등판
"내 경험상 4~5개 던지고 다음날 선발 등판하는 건 심각한 건 아니다"
"김민우는 내 경험상 4~5개 던지고 다음날 선발 등판하는 건 심각한 건 아니다"며 "어제 커브 제구가 안 돼서 몸에 맞는 걸 보고 길게 가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커브 제구가 안 되면 어렵게 간다"
7. 표적선발 관련
김성근: 양현종은 왜 한화전에만 나오나?
한화 김성근 감독은 이날 경기 전부터 KIA 선발이 양현종인 것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어깨와 팔꿈치 미세통증으로 양현종의 등판이 지연됐던 사실을 놓고 “왜 한화전에만 나오냐”고 지적했다. 양현종은 8월 2일 대전 한화전에 마무리로 자원 등판한 적도 있다.
이외에도 올 시즌 양 팀의 맞대결에선 유독 몸에 맞는 공도, 부상선수도 쏟아졌다. 8월 22일 광주 경기에선 한화 이용규가 KIA 일부 팬들에게 욕설과 오물 세례를 받는 사고도 있었다. 9월 2일 청주 경기에선 4회말 수비 도중 KIA 김기태 감독이 덕아웃의 CCTV를 문제 삼으면서 날선 신경전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떠올랐는지 김성근 감독은 “KIA와 붙으면 참 일이 많았다”고 말했다.
8. 아차 싶었다!
“경기에 져서 열 받았나 보다. 경기가 끝나는 순간 다음 날 선발 투수를 결정하는데, 숙소 들어가서 아차 싶었다.”
투수 혹사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한화 김성근 감독은 8일 LG전에서 패한 뒤 다음 날 선발 투수로 송창식을 예고했다. 5일 두산전에서 선발 등판해 7이닝 동안 117구를 던졌던 송창식이 3일 휴식 후 선발 등판하게 된 것이다. 김 감독은 “(송창식에게 휴식일을 더 주면서) 선발 로테이션에 변화를 줬어야 했는데, 잊어버리고 예전에 짠 순서대로 송창식을 선발로 예고했다”며 ‘실수’를 인정했다. 이전 경기에서 115구 이상 던진 선발 투수가 3일만 쉬고 다시 선발 등판한 건 2006년 두산 리오스 이후 9년 만이다.
실수의 대가는 컸다. 송창식은 9일 LG전에서 1회말 이진영에게 2점 홈런, 2회말 선두 타자 유강남에게 다시 1점 홈런을 허용해 강판됐다. 한화 타선도 부진해 LG 선발 소사에게 8회 1사까지 무안타로 침묵했다. 한화는 김경언이 번트까지 시도했지만 실패한 뒤 내야안타를 날려 아웃카운트 5개를 남기고 노히트노런의 수모에서 벗어났다.
결국 허구연/탈보트 의해 이거또한 거짓말로 밝혀집니다
9. 권혁 정상에 서보지 못한 투수 논란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김성근(73) 감독은 최근 마무리 투수 권혁(32)을 불렀다. 지난달 15, 16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이틀 연속 패전투수가 된 권혁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김 감독은 한화 홈구장 이글스파크 옆에 있는 보문산을 가리켰다.
“저기 산 정상이 보이지? 거긴 바람이 많이 불 거야. 산 밑에는 바람 한 점 없겠지.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넌 예전에 산에 오르지 못했어. 그러니 욕하는 사람도 없었지. 그런데 지금 넌 정상에 있어. 그래서 바람을 맞는 거야.”
10. '뿔난' 김성근 감독, "탈보트는 실패한 투수다"
김성근 감독은 6일 대전 LG전을 앞두고 탈보트를 1군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다소 의외의 결정이다. 탈보트는 올해 한화 선발 마운드의 에이스. 현재 한화 마운드는 비상 체제다. 선발 투수들이 제 몫을 못하면서 불펜 투수들이 일찍 마운드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패턴이 시즌 내내 계속 이어졌고, 현재 한화 불펜 투수들의 피로 누적이 심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에이스 투수’를 엔트리에서 빼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날 취재진을 만난 김 감독은 ‘실패’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며 탈보트에 대한 질책성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선발 투수가 5번 연속 승리에 실패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11. 한화에게 필요한 것? “한계를 극복하라”
사실 5위 싸움이 혼전 양상으로 접어들면서 한화가 공공의 적이 됐다. 구단측에서는 “진짜 팬심이 돌아섰다면, 사무실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김성근 감독이 팀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비난 여론이 거세다. 전문가들까지 “한화 투수진이 혹사당하고 있다”며 비난 행열에 동참했다. 권혁이 몇 이닝을 던졌고, 송창식이 며칠 쉬고 선발등판했다는 얘기가 거의 매일 포털사이트 메인 페이지를 장식한다. 밖에서 보는 대다수 시선이 “한화 선수들은 모두 혹사를 당하고 있다”는 쪽으로 몰리자 선수들도 혼란을 겪는 표정이다. 하지만 김 감독은 흔들림 없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입 닫고 우리 야구만 열심히 하겠다”며 외부와 소통을 차단해버렸다. 대신 선수단에는 짧고 분명한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고 있다. 선수 스스로 각자 한계를 극복해보라는 것이다. 김 감독의 논리는 단순하다. 올해 생애 처음으로 100이닝을 돌파한 권혁은 내년부터는 100이닝 정도는 거뜬히 소화할 수 있는 투수가 된다. 쓰임새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큰 의미에서 보면, 한화는 팀 색깔을 바꾸기 위해 올시즌을 통째로 스프링캠프처럼 치르고 있다.
12. "사람의 잠재력은 무궁무진 한계 정해 놓으면 거기서 멈춰"
“ 사람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해. 한계를 정해 놓으면 사람은 거기서 멈춰. 나도 펑고(수비수의 훈련을 위해 땅볼이나 뜬공을 때려주는 것)를 두 시간씩 치면 숨이 차고 심장이 막 뛰어. 그럼 좀 조절하고 다시 뛰면 괜찮아. 난 그렇게 강해졌지. 2010년엔 두 어깨 인대가 끊어졌다고. 팔을 어깨 높이까지밖에 들지 못해 유니폼도 혼자 못 입었어. 그런데 스트레칭하고 강화 훈련하니까 괜찮아졌어. 오버워크를 해서 한계를 넘는 거지. 전쟁에서 발목 삐었다고 걸을 수 있나. 뛰어야지.”
13. KBO공인구 탱탱볼 부정구 논란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이 공인구의 반발력을 문제삼았다. 김 감독은 30일 울산 문수구장에서 벌어질 롯데 자이언츠전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나 "어제 안영명은 가슴에 공을 맞은 게 아니라 공이 얼굴로 향했으면 죽을 뻔했다"면서 "공 반발력은 심각한 문제다. 너무 잘 나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감독은 이어 "최준석이 어제 친 라이너 타구도 쭉 날아가더라. 마치 골프공 날아가는 것 같더라"고 말했고, 손목을 돌리며 "황재균도 이렇게 쳤는데 상단까지 날아갔다"고 덧붙였다. 또한 김 감독은 "내가 (공인구를) 잡아보니 작은 느낌이 있다. 정확하게 재봐야 알겠지만, 매 경기 전에 공 체크는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현재 KBO리그는 4개사 공인구를 사용 중이다. 김 감독은 "공인구를 4개 회사에서 만드는 게 어디 있는가. KBO는 항상 '내년에 한다'고만 말한다. 총재 직인이 찍혀있다는 건 공을 인정했다는 이야기인데, 만약 부정구라도 나오면 어쩌겠냐"며 문제를 지적했다.
14. 황재균 빈볼논란
-김 감독에 대한 비난 여론이 뜨겁다. 상대 감독(롯데 이종운 감독) 역시 날이 선 발언을 했는데.
"그런 점은, 뭐랄까. 참 안타깝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상대 벤치에 대한 발언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야구는 전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매너를 갖춘 스포츠다."
-매너를 갖춘 스포츠라. 12일 경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는 뜻인가.
"이 경기만이 아니고, 부산에서 3연전을 치르는 내내 예민하고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이제와서 말하진 않겠지만. 어쨌든 롯데와 분위기가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후배 감독과도 그렇고. 전쟁이 아니지 않나. 앞으로 서로 매너있게 스포츠로 만나길 바란다."
9/19/2015
1997 해태타이거즈 우승 비화
김대호가 본 한국시리즈, 1997년 해태 최후의 우승
김대호(전 스포츠투데이 야구부장) / 2006-10-11
9년, 긴 세월이라면 긴 세월이고 짧은 시간이라면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해태를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는 아득한 옛날로 느껴진다. 그만큼 주변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한국프로야구를 10년 넘게 호령했던 해태의 위용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됐고, 그 안에서 뒹굴었던 선수들도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1997년 한국시리즈는 스러져가는 해태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비록 통산 9번째 우승은 했지만 곳곳에서 드러나는 ‘운명’의 불씨는 조금씩 그 형체가 커지고 있었다.
1997년 이순철의 나이는 만 36살로 프로 13년째였다. 1985년 입단해 해태의 7차례 우승을 일궈냈던 팀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지금은 여기저기 끌어다 쓰는 ‘정신적 지주’라는 말도 이순철로부터 비롯됐다.
그해 한국시리즈 1차전을 이틀 앞둔 10월 17일 한국시리즈 엔트리가 발표됐다. 이순철이 빠졌다. 충격이었다. 아무리 한물간 ‘영감’ 취급받는 선수라 해도 해태 안에 이순철만한 리더가 있는가. 또 이순철만큼 노련하게 경기를 이끌어갈 재주꾼이 있단 말인가. 김응룡 감독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일단 이순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순철은 내가 기자생활을 시작한 1988년부터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매사에 진지하고, 학구적이고, 또 진실된 이순철을 나는 선수 이전에 한 인간으로 참 좋아했다.
“김기자(이순철은 처음 나를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렇게 부른다), 나 어떻게 했으면 좋겠수? 이렇게 되려고 몸 바쳐 운동한 건 아닌데….” 이순철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슨 의미일까요?” 나는 대충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짐짓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긴 뭐겠수, 운동 그만 하라는 뜻이지” 이순철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다.
“나는 절대 이렇게 은퇴는 못해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그래도 일단 한국시리즈는 끝내고 구단에 정식으로 얘기를 하든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순철은 “무슨 소리, 당장 구단에 트레이드 요청할 거요.”
이순철은 단호했다.
사실 이순철의 이런 반응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김응룡 감독에 대한 이순철의 반감, 아니 배신감은 시즌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화와의 더블헤더였다. 김감독은 한창 슬럼프를 겪고 있던 이순철을 선발에서 빼고 대수비로 넣었다가 그의 타석이 돌아오자 대타를 기용했다. 이순철은 경기 중에 짐을 싸서 운동장을 떠났다. 그 뒤로 김감독은 이순철을 사실상 전력에서 제외했다.
며칠 뒤 이순철은 이렇게 말했다. “선수를 넣고 빼는 데도 예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나는 프로선수고 팀에서 최고참입니다. 팬들과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견디기 어려운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김응룡 감독은 내 심정을 모를 겁니다.”
이순철의 ‘트레이드 요청’은 이튿날 아침 스포츠신문 1면에 대서특필됐다. 한국시리즈를 하루 앞둔 해태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구단에서는 더 이상의 잡음과 팀내 분란을 막기 위해 집안 단속에 들어갔고, 김감독은 특유의 ‘분위기 잡기’를 시작했다.
“아니, 올시즌 이순철이 팀에서 한 게 뭐 있어? ‘정신적 지주’는 무슨 얼어 죽을….” 김감독의 독설은 이어졌다. “트레이드? 좋은 얘기다. 우리 해태가 네 녀석 없이도 우승할 테니 두고 봐라.”
김응룡 감독은 승부를 겨루는 데 ‘9단’이다. 그는 이순철의 돌출행동을 팀의 단합을 이끌어 내는 수단으로 역이용하고 있었다. 이순철도 김감독의 노회한 수읽기를 잘 알고 있었다. “해태는 우승할 겁니다. 그리고 나는 쓸쓸히 쫓겨 나겠지요.”
이순철은 그해 한국시리즈를 지켜보지 않았다. 해태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3승2패로 힘겹게 따돌린 LG를 4승1패로 가볍게 누르고 통산 9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김감독은 우승 축하연이 끝난 뒤 “이순철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트레이드시켜 주라”고 구단에 요청했다. 이순철은 우여곡절 끝에 13년 동안 정들었던 해태 유니폼을 벗고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선동열은 일본 주니치로 옮겼고, 김성한은 은퇴 뒤 역시 주니치로 연수를 떠났다. 여기에 이순철마저 불명예 이적했다. 해태의 머리위로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천재’ 이종범의 운명
김응룡 감독이 이순철 없이도 우승을 자신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야구천재’ 이종범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종범은 해태야구의 ‘실마리이자 매듭’이었다. 예전에 이순철이 그랬듯이.
이종범은 김응룡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1차전부터 펄펄 날더니 한국시리즈 MVP로 뽑혔다. 이종범은 팀의 우승을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MVP 인터뷰에서 드디어 속내를 털어 놓았다.
“일본으로 진출하고 싶습니다. 구단에서 보내줄 것으로 믿습니다.” 이종범은 팀을 우승시켜 놓은 뒤 ‘일본 진출’이라는 나름대로의 계획을 완벽하게 이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는 프리에이전트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구단의 허락없인 팀을 옮길 수 없었다. 이전부터 이종범의 의중을 짐작하고 있던 나는 수시로 “시즌이 끝나면 폭탄발언을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이종범은 노코멘트였다.
이종범은 매우 자신만만한 성격을 가진 선수다. 그래서 기자들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일본에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라든지 ‘구단의 생각은 어떤지 알 수 있는가’ 등등 기자들의 도움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2년 전 일본으로 건너간 선동열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스타일이라면 이종범은 약간은 다혈질이고 시원시원한 편이다.
우승분위기에 한껏 젖어 있어야 할 해태는 이종범의 요구에 골치를 앓았다. 일단 공식적인 반응은 ‘절대 불가’였다. 이종범이 빠진 해태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의웅 구단 사장은 “선동열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종범마저 보낸다면 해태는 호남팬들의 돌팔매를 맞을 것이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이는 마사장과 해태의 고단수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복안이었다. 당시 해태는 모기업의 화의에 따른 구조조정이 한창이었다.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고 모기업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구단의 이런 처지를 모르지 않는 이종범은 맞불작전을 놓았다.
“만약 일본으로 가지 못하면 선수 생활이고 뭐고 다 그만 두겠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이종범은 만 27살이었다. 그리고 언론을 통해 “동해바다로 가 죽어버리고 싶다”고 구단에 으름장을 놨다. 겉으론 ‘불가방침’을 밝혀 놓고서 속으론 이미 일본 주니치와 물밑협상을 벌이고 있던 해태구단은 드디어 중대발표를 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이종범을 일본으로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형식은 트레이드가 아닌 임대다. 국내복귀 땐 무조건 해태가 1순위이다.”
여론을 의식한 방편이었다. 비록 일본에 보내지만 돈 때문에 팔았다는 비난을 피하면서 해태 소속이란 점을 강조했다. 해태의 통산 9번째 우승 후유증은 이종범 파동이 끝이 아니었다.
▲‘코끼리’ 김응룡의 운명
해태의 통산 9번째 우승을 손수 일군 김응룡 감독은 구단에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구단은 암암리에 긴축운영의 불가피성을 내세우면서 주축선수의 현금트레이드 필요성을 언급해 왔다. 이에 대해 김감독의 입장은 분명했다.
“현금으로 선수를 팔면 큰 둑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팀워크는 와해되고 선수들은 제 살 길만 찾게 된다.”
안팎의 어려움을 딛고 우승을 차지한 김응룡 감독은 구단에 선수 유출을 막아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런데 이종범의 일본진출이 결정된 것이다. 김감독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마의웅 사장과 거친 말이 오갈 정도였다. 선동열이 갈 때만 해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종범마저 없다면 아무리 김응룡 감독이라 해도 팀을 꾸려 나갈 자신이 없었다. 이종범의 일본진출이 결정된 이튿날 김감독이 갑자기 사라졌다. 구단 측에는 물론 가까운 지인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
김감독은 열흘 정도 미국에 머문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유학 중인 두 딸을 하와이에서 만나고 왔다”고 했지만 그의 외유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 김응룡 감독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팀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고 싸늘한 냉소만 감돌았다. 틈만 나면 구단을 욕했다. 이듬해인 1998년 시즌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경기 중에 멍하니 다른 데를 쳐다보고 있는가 하면 팀이 연패에 빠져도 그저 시큰둥할 뿐 별다른 내색이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 같았다. 김응룡 감독의 마음이 해태를 완전히 떠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김감독은 해태를 9번째 우승시켜 놓은 직후부터 해태와 이별준비에 들어갔다.
김응룡 감독은 1998년 시즌이 끝난 뒤 삼성으로부터 집요한 러브콜을 받는다. 김감독의 마음도 상당히 움직였다. 그러나 그동안의 정이 문제였다. 그리고 박건배 구단주와의 의리가 발목을 잡았다. 눈물을 머금고 해태에 눌러 앉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마침내 김응룡 감독은 1999년 말 삼성행을 결정했다. 김감독의 1997년 9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은 해태에게 준 마지막 선물인 동시에 해태와 정을 끊는 도화선이 된 셈이다.
▲‘영욕’ 해태의 운명
1997년 해태는 또 다시 정상에 올랐다. 9차례나 맛본 우승이라 덤덤했을까. 10월 25일, 마지막 5차전이 끝나고 숙소인 서울 리베라호텔 지하 나이트클럽. 예전이라면 흥에 겨워 서로 술잔을 나누며 정신없이 우승의 기쁨을 즐겨야 할 선수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둡다. 최고참 김정수가 나를 불렀다.
“김기자, 일년 동안 수고했습니다. 한 잔 받으시죠.”
“그런데 왜들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오늘같은 날.”
내 물음에 김정수는 아무 대답없이 술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언제부터인가 프로야구선수들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 구단주의 한 마디를 기다린다. 그리고 당연히 구단주는 ‘두툼한 돈 보따리’를 푼다. 하지만 1997년 해태엔 이런 연례행사가 없었다. 구단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선수들이지만 이날만은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선수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2000년 초. 해태는 18년 동안의 영욕을 세월을 뒤로 하고 기아로 넘어갔다.
김응룡 감독의 “동열이도 가고~, 종범이도 가고~”라는 희대의 유행어를 남긴 채.
9/19/2015
안마방 카운터 알바할때 고딩때 담임 만난썰. SSUL
노인증 ㅈㅎ는 달게 받겠다 걍 재미로 읽어주라
때는 23살 공익할때
조기축구하다가 건너서 알게된 40대 아재 하나있었는데
공익월급 20만원도 안되서 몰래 알바 하려고 하는데
그 40대 아재가 아가씨장사하는데 자기네 주말야간 알바해달라해서 하게됨
내가 키 188/82 헬스해서 몸 좆나 다부지고 인상도 좋은편 아니라서 그때 삼촌이 카운터 일해달라함
밤9시~아침7시까지 일당 12만원 준다 길래 나한테 개꿀알바 라서 한다고함
시스템이 삼촌이 호객하고 삼촌의 누나(이모라 부름)가 카운터보는데 이모가 주말엔 아침 6시쯤에 나 내보내고 청소하고 했음
거기안에 누나들3명 (나이대 평균 30대 ) 로테돌리다가 바쁘면 다른 가게 누나들 와서 뛰는 시스템 이었음
누나들 머먹고싶다거나 잔심부름 해주고 카운터 손님 돈 계산하고 CCTV확인하는 일했는데
금요일 11시였나 아재들 3명이 온거임 근데 한놈이 딱봐도 누군지 알겠다 싶을정도로 눈에 꽂힘
나 고2때 담임이었는데 이새끼 파오후에 목소리는 게이같고 국어 선생이엇는데 걍 교과서만읽고 자습시키고 심심하면 가카랑 엔두성님 까고
노무현 좆나 찬양하는 전교조씹새끼였음 근데 이놈이 돈좆나 밝히고 애들 대놓고 차별해서 좆나 시러했는데
하필 여기서 술 댄채 왔는데 오자마자 가슴큰 아가씨 넣어달라더라 ㅋㅋㅋㅋㅋㅋ
여전하네 ㅄ이 속으로 이러면서 방안내 하고 가게에 대기하고있는누나중 36살에 제일 못생긴누나 거기 넣어줌
그러니 빠꾸시키길래 다른가게에 호출했는데 나름 ㅍㅌㅊ치는 누나 와서 어쩔수없이 넣어줌
이새끼 ㅅㅅ 좆나 못할거같다 생각햇는데 제일먼저 나옴
담임새끼 먼저나와서 다른일행 기다리는동안 음료수 하나달라길래 스콜 작은거 하나줌 그거마시면서
나보더니 삼촌아 어디서 낯이 많이익네 이러길래
내가 그러게요 저도 뵌분 같네요 이러니
어디서 본거같노 이러길래
글쌔요 걍 학교서 본거 같은데요 이러니
이새끼 표정 정색하더니 혹시 자기 아냐고 물어보는데
때마침 일행들 우르르 나오고 계속 나보고 학교어디 나왓냐길래 걍 검정고시라고 뻥침 ㅋㅋㅋㅋㅋㅋ
그러니 나가면서도 아 어디서 봤는데 이럼
나중에 담임새끼 떡친곳 가보니 이새끼 냉장고에 스콜 3개나처 까먹고 밖에서 하나더 까먹었고
담임이랑 ㅅㅅ했던 누나한테 물어보니 담임ㅄ새끼 할때마다 똥구멍 만저달라하고 소리좆나내고 사랑한다고 했다는데
웃기면서 슬프더라ㅠㅠ
3줄요약
1.안마방 카운터 알바하면서 고딩때 담임봄
2.담임이 나보고 낯익다햇는데 걍 모른척함
3. 담임 ㅄ 조루 양성똥꼬충
출처 : 일베
9/15/2015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