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해태타이거즈 우승 비화

0 Comments



김대호가 본 한국시리즈, 1997년 해태 최후의 우승
김대호(전 스포츠투데이 야구부장) / 2006-10-11

9년, 긴 세월이라면 긴 세월이고 짧은 시간이라면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해태를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는 아득한 옛날로 느껴진다. 그만큼 주변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한국프로야구를 10년 넘게 호령했던 해태의 위용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됐고, 그 안에서 뒹굴었던 선수들도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1997년 한국시리즈는 스러져가는 해태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비록 통산 9번째 우승은 했지만 곳곳에서 드러나는 ‘운명’의 불씨는 조금씩 그 형체가 커지고 있었다.

1997년 이순철의 나이는 만 36살로 프로 13년째였다. 1985년 입단해 해태의 7차례 우승을 일궈냈던 팀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지금은 여기저기 끌어다 쓰는 ‘정신적 지주’라는 말도 이순철로부터 비롯됐다.

그해 한국시리즈 1차전을 이틀 앞둔 10월 17일 한국시리즈 엔트리가 발표됐다. 이순철이 빠졌다. 충격이었다. 아무리 한물간 ‘영감’ 취급받는 선수라 해도 해태 안에 이순철만한 리더가 있는가. 또 이순철만큼 노련하게 경기를 이끌어갈 재주꾼이 있단 말인가. 김응룡 감독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일단 이순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순철은 내가 기자생활을 시작한 1988년부터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매사에 진지하고, 학구적이고, 또 진실된 이순철을 나는 선수 이전에 한 인간으로 참 좋아했다.

“김기자(이순철은 처음 나를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렇게 부른다), 나 어떻게 했으면 좋겠수? 이렇게 되려고 몸 바쳐 운동한 건 아닌데….” 이순철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슨 의미일까요?” 나는 대충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짐짓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긴 뭐겠수, 운동 그만 하라는 뜻이지” 이순철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뭔가 조짐이 이상했다.
“나는 절대 이렇게 은퇴는 못해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그래도 일단 한국시리즈는 끝내고 구단에 정식으로 얘기를 하든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순철은 “무슨 소리, 당장 구단에 트레이드 요청할 거요.”

이순철은 단호했다.
사실 이순철의 이런 반응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김응룡 감독에 대한 이순철의 반감, 아니 배신감은 시즌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화와의 더블헤더였다. 김감독은 한창 슬럼프를 겪고 있던 이순철을 선발에서 빼고 대수비로 넣었다가 그의 타석이 돌아오자 대타를 기용했다. 이순철은 경기 중에 짐을 싸서 운동장을 떠났다. 그 뒤로 김감독은 이순철을 사실상 전력에서 제외했다.
며칠 뒤 이순철은 이렇게 말했다. “선수를 넣고 빼는 데도 예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나는 프로선수고 팀에서 최고참입니다. 팬들과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견디기 어려운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김응룡 감독은 내 심정을 모를 겁니다.”

이순철의 ‘트레이드 요청’은 이튿날 아침 스포츠신문 1면에 대서특필됐다. 한국시리즈를 하루 앞둔 해태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구단에서는 더 이상의 잡음과 팀내 분란을 막기 위해 집안 단속에 들어갔고, 김감독은 특유의 ‘분위기 잡기’를 시작했다.

“아니, 올시즌 이순철이 팀에서 한 게 뭐 있어? ‘정신적 지주’는 무슨 얼어 죽을….” 김감독의 독설은 이어졌다. “트레이드? 좋은 얘기다. 우리 해태가 네 녀석 없이도 우승할 테니 두고 봐라.”

김응룡 감독은 승부를 겨루는 데 ‘9단’이다. 그는 이순철의 돌출행동을 팀의 단합을 이끌어 내는 수단으로 역이용하고 있었다. 이순철도 김감독의 노회한 수읽기를 잘 알고 있었다. “해태는 우승할 겁니다. 그리고 나는 쓸쓸히 쫓겨 나겠지요.”

이순철은 그해 한국시리즈를 지켜보지 않았다. 해태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3승2패로 힘겹게 따돌린 LG를 4승1패로 가볍게 누르고 통산 9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김감독은 우승 축하연이 끝난 뒤 “이순철을 본인이 원하는 대로 트레이드시켜 주라”고 구단에 요청했다. 이순철은 우여곡절 끝에 13년 동안 정들었던 해태 유니폼을 벗고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선동열은 일본 주니치로 옮겼고, 김성한은 은퇴 뒤 역시 주니치로 연수를 떠났다. 여기에 이순철마저 불명예 이적했다. 해태의 머리위로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천재’ 이종범의 운명

김응룡 감독이 이순철 없이도 우승을 자신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야구천재’ 이종범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종범은 해태야구의 ‘실마리이자 매듭’이었다. 예전에 이순철이 그랬듯이.

이종범은 김응룡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1차전부터 펄펄 날더니 한국시리즈 MVP로 뽑혔다. 이종범은 팀의 우승을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MVP 인터뷰에서 드디어 속내를 털어 놓았다.

“일본으로 진출하고 싶습니다. 구단에서 보내줄 것으로 믿습니다.” 이종범은 팀을 우승시켜 놓은 뒤 ‘일본 진출’이라는 나름대로의 계획을 완벽하게 이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는 프리에이전트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구단의 허락없인 팀을 옮길 수 없었다. 이전부터 이종범의 의중을 짐작하고 있던 나는 수시로 “시즌이 끝나면 폭탄발언을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이종범은 노코멘트였다.

이종범은 매우 자신만만한 성격을 가진 선수다. 그래서 기자들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일본에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라든지 ‘구단의 생각은 어떤지 알 수 있는가’ 등등 기자들의 도움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2년 전 일본으로 건너간 선동열이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스타일이라면 이종범은 약간은 다혈질이고 시원시원한 편이다.

우승분위기에 한껏 젖어 있어야 할 해태는 이종범의 요구에 골치를 앓았다. 일단 공식적인 반응은 ‘절대 불가’였다. 이종범이 빠진 해태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의웅 구단 사장은 “선동열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이종범마저 보낸다면 해태는 호남팬들의 돌팔매를 맞을 것이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이는 마사장과 해태의 고단수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복안이었다. 당시 해태는 모기업의 화의에 따른 구조조정이 한창이었다.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고 모기업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구단의 이런 처지를 모르지 않는 이종범은 맞불작전을 놓았다.

“만약 일본으로 가지 못하면 선수 생활이고 뭐고 다 그만 두겠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이종범은 만 27살이었다. 그리고 언론을 통해 “동해바다로 가 죽어버리고 싶다”고 구단에 으름장을 놨다. 겉으론 ‘불가방침’을 밝혀 놓고서 속으론 이미 일본 주니치와 물밑협상을 벌이고 있던 해태구단은 드디어 중대발표를 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이종범을 일본으로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형식은 트레이드가 아닌 임대다. 국내복귀 땐 무조건 해태가 1순위이다.”

여론을 의식한 방편이었다. 비록 일본에 보내지만 돈 때문에 팔았다는 비난을 피하면서 해태 소속이란 점을 강조했다. 해태의 통산 9번째 우승 후유증은 이종범 파동이 끝이 아니었다.

▲‘코끼리’ 김응룡의 운명

해태의 통산 9번째 우승을 손수 일군 김응룡 감독은 구단에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구단은 암암리에 긴축운영의 불가피성을 내세우면서 주축선수의 현금트레이드 필요성을 언급해 왔다. 이에 대해 김감독의 입장은 분명했다.

“현금으로 선수를 팔면 큰 둑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팀워크는 와해되고 선수들은 제 살 길만 찾게 된다.”

안팎의 어려움을 딛고 우승을 차지한 김응룡 감독은 구단에 선수 유출을 막아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런데 이종범의 일본진출이 결정된 것이다. 김감독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마의웅 사장과 거친 말이 오갈 정도였다. 선동열이 갈 때만 해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종범마저 없다면 아무리 김응룡 감독이라 해도 팀을 꾸려 나갈 자신이 없었다. 이종범의 일본진출이 결정된 이튿날 김감독이 갑자기 사라졌다. 구단 측에는 물론 가까운 지인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

김감독은 열흘 정도 미국에 머문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유학 중인 두 딸을 하와이에서 만나고 왔다”고 했지만 그의 외유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 김응룡 감독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팀에 대한 열정은 사라지고 싸늘한 냉소만 감돌았다. 틈만 나면 구단을 욕했다. 이듬해인 1998년 시즌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경기 중에 멍하니 다른 데를 쳐다보고 있는가 하면 팀이 연패에 빠져도 그저 시큰둥할 뿐 별다른 내색이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 같았다. 김응룡 감독의 마음이 해태를 완전히 떠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김감독은 해태를 9번째 우승시켜 놓은 직후부터 해태와 이별준비에 들어갔다.

김응룡 감독은 1998년 시즌이 끝난 뒤 삼성으로부터 집요한 러브콜을 받는다. 김감독의 마음도 상당히 움직였다. 그러나 그동안의 정이 문제였다. 그리고 박건배 구단주와의 의리가 발목을 잡았다. 눈물을 머금고 해태에 눌러 앉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마침내 김응룡 감독은 1999년 말 삼성행을 결정했다. 김감독의 1997년 9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은 해태에게 준 마지막 선물인 동시에 해태와 정을 끊는 도화선이 된 셈이다.

▲‘영욕’ 해태의 운명

1997년 해태는 또 다시 정상에 올랐다. 9차례나 맛본 우승이라 덤덤했을까. 10월 25일, 마지막 5차전이 끝나고 숙소인 서울 리베라호텔 지하 나이트클럽. 예전이라면 흥에 겨워 서로 술잔을 나누며 정신없이 우승의 기쁨을 즐겨야 할 선수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둡다. 최고참 김정수가 나를 불렀다.

“김기자, 일년 동안 수고했습니다. 한 잔 받으시죠.”
“그런데 왜들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오늘같은 날.”

내 물음에 김정수는 아무 대답없이 술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언제부터인가 프로야구선수들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 구단주의 한 마디를 기다린다. 그리고 당연히 구단주는 ‘두툼한 돈 보따리’를 푼다. 하지만 1997년 해태엔 이런 연례행사가 없었다. 구단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선수들이지만 이날만은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선수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2000년 초. 해태는 18년 동안의 영욕을 세월을 뒤로 하고 기아로 넘어갔다.

김응룡 감독의 “동열이도 가고~, 종범이도 가고~”라는 희대의 유행어를 남긴 채.

헤니

Some say he’s half man half fish, others say he’s more of a seventy/thirty split. Either way he’s a fishy bastard.

0 Comments: